본문 바로가기
Lifestyle/Write down

계단

by 슈리릭 2020. 2. 10.
728x90
반응형

Photo by ctx vmp4 on Unsplash

 

십여 년 전 일이다.

첫 직장을 다니며 퇴근 후 취미로 바이올린 교습소를 다니고 있었다. 

보급형 바이올린을 싸게 구입한 나는 매주 목요일마다 회사에 바이올린을 들고 출근했다.

 

그 날은 개인 노트북도 챙겨야 했던 날이었는데, 등에는 바이올린을 메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노트북, 왼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여느 목요일과 다를 바 없이 퇴근 후 교습이 있는 날이었고, 양손 가득 든 짐이 거추장스러웠지만 금요일 휴가를 내 둔 상태였기에 어떻게든 짐을 챙겨서 퇴근했어야 했다.

 

한 시간 레슨이 끝나고, 나는 들고 온 짐을 그대로 챙겨 나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다음 시간 수강생이 있었기 때문에 더 조바심이 났다.

왔던 그대로 바이올린을 둘러 메 등에 받치고, 오른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왼손에는 쇼핑백을 들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코트 앞섶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였는데, 교습소 카운터 실장에게 대충 목례를 하고 부랴부랴 나왔다.

 

교습소는 4층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구형 건물이었다. 불빛이 희미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눈 깜짝 할 새에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구간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누군가 보았다면 퍽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터다. 그대로 누워버린 나는 몇 초간 거뭇거뭇한 얼룩이 묻은 천장을 올려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등에 바이올린이 있어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추락에 몸이 잔뜩 경직됐다. 반사적으로 고가의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노트북을 든 오른손을 가슴팍으로 끌어오느라 근육이 놀란 듯 잘게 경련했다.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내쉬며 거친 호흡이 정돈되기를 기다렸다. 몸을 일으키는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오르는 것은 쉽다. 그런데 내려갈 때마다 칸을 잘못 계산해 주춤거리거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감각을 잠식한다. 계단 끝이 턱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도 주춤거리는 것은 똑같다. 일찌감치 마음에서 두려움이 피어나 있는 것이다. 그저 발을 한발 내딛는 것 뿐이고, 한칸 내려오는 것 뿐인데도 넘어질까 두렵다. 이는 에스컬레이터도 마찬가지다. 발을 헛디딜 것만 같고, 실수할 것만 같다. 봉을 잡거나, 안전 바를 잡아도 마찬가지다.

 

겁 없던-비단 겁만 없지는 않았겠지만- 십대에는 네다섯 칸도 너끈히 내려오고 올라가고는 했었다.

왜 별것 아닌 것에 겁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긴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 두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반드시 극복해야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몇칸 안되는 계단 앞에서 등골이 서늘해진다.

'Lifestyle > Write dow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0) 2020.02.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