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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Book Review

[북리뷰] 구디 얀다르크

by 슈리릭 201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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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새로 더 빌리고 싶어서 반납하기 전 급하게 찍은 책 이미지

  • 제목: 구디 얀다르크
  • 작가: 염기원
  • 출판사: 은행나무 출판사

 

 

토요일마다 집 근처 도서관을 찾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마침 읽고 싶은 도서가 있어서 사전에 검색을 해보았는데, 소장중인 도서가 아니었다.

도서관 이용이 익숙치 않은 내게 도서 신청은 가뭄에 단비 같았고, 나는 바로 신청을 했다.

(본가에 살 때는 도서관이 멀어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무조건 사서 보았고, 알라딘 중고책을 판매하거나 기증했다.)

 

 

여하튼, 일주일에 걸려서 겨우 책을 받았고, 대여기회를 놓쳐 계속 못 보다가 지난 주 대여해 읽었다.

처음에는 퍽 읽히지 않았던 문장들이 초중반에 들어서자 술술 읽혀내려갔다.

 

구디 얀다르크는, 구디(구로디지털단지)와 이안(주인공 이름)+잔다르크의 합성어이다.

제목을 본 사람들은 짐작하여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구디 얀다르크는 IT업계에 종사했던 주인공인 "사이안"의 이야기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았나. 딱 그 말이 맞았다.

사이안의 인생은 굴곡졌고, 구부졌으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어쩌면 그녀의 탈 많음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이 아니라 흔한 남성 근로자였다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중간중간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갔다.

 

 

48p 내가 세상을 배울 때 그녀는 세상을 버렸고, 내가 물이 오를 때 그녀는 시들어갔다.

 

 

일찍 떠나 버린 아버지, 그에 미쳐버린 어머니. 문장을 훑는 눈이 뻑뻑해졌다.

 

 

50p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 같은 년을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술 한 병 사다준 적 있니? 다 큰 딸년 등록금도 내주고 용돈도 따박따박 줬지. 너는 엄마한테 뭘 해줬어?
아무리 화가 나도 욕 한마디 못하던 엄마가 핏대를 세우며 내게 소리 질렀다. 그 내용에 더욱 놀랐다. 나를 낳은 후 품에 안았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엄마는 말했었다.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걸 물어봐도 우리 딸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던 엄마다. 그런 엄마가 펙트로 폭격을 가했고 꼭꼭 숨겨두었던 내 죄책감을 아프게 건드렸다. 사랑이 거세된 혈육 간의 대화는 치명적인 무기로 서로를 때리는 싸움이 되었다. 나는 엄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유일한 무기였고 내 생애를 오롯이 아는 엄마의 폭언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로운 메스가 되었다.

 

 

나 역시 효녀는 아니었다. 친근한 딸도 아니고, 말도 툭툭 내뱉고 삐딱한 성격이라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출근을 하면서 읽기 때문에 해당 페이지를 읽고서는 미안하고 울컥한 마음에 엄마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 앞으로 말 더 다정하게 할게. 사랑해요 엄마. 우리 더 잘 해가요. 하고 말이다.

 

 

118p 열다섯 페이지에 불과한 기획안이었지만 병아리 기획자로서 처음 삐약 소리를 낸 날이었다. 내가 만든 기획안을 여러 명 앞에서 발표하고 본부 내 모든 팀장에게 검토받아 정식으로 진행됐다. 투입된 담당자들과 모여 길고 치열한 회의까지 마치고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때가 직장인으로서 내 전환기였다. 월급에 삶을 저당 잡힌 노예의 삶에서,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출근하는 생활에서 벗어났다. 취업준비생 시절 꿈꾸던 멋진 직장인이 된 것 같았다.

 

 

작년의 내가 그랬다.

마케팅 직무에서 과감히 기획 직군으로 넘어오던 때, 막연한 자신감과 깜깜한 길 앞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사이안이 처음 소리를 냈던 열다섯 페이지의 기획안은 나를 1년 전 과거의 상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기획한 앱서비스의 아이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엉망이었고 의지만 앞섰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투입된 개발자들과 디자이너들, 그리고 UX디자이너들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기획 신입이 예약 앱을 총괄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155p 회사에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는 것과 이력서에 적힌 가족관계란을 채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인종이나 외모로 차별하겠다는 사진 제출과는 다른 차원의 폭력이었다. 인사관리를 위해 회사가 직원의 가족관계나 세대주와의 관계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가소롭고 얼마나 폭력적이던가.

나의 삶과, 나의 의지와, 나의 가능성을 문서로 가늠은 할 순 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과 형제자매에 대해 그들이 어찌 알 것이며, 왜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수집한단 말인가.

특히나 화자인 사이안에게는 더욱 더 큰 폭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58p IT 업계에서 이직은 연봉을 훌쩍 올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삼 년마다 이직하는 이들도 많다.

 

 

얼마 전 만난 기획자 I도 내게 유사한 말을 했다.

IT 시장에서 기획자나 개발자들이 최근에 일 년 남짓으로 이직하며 몸값을 올리고 있다고 말이다. 예전엔 삼 년이었고, 이제는 그보다 더 줄어들었다고 했다. 지난 주 만났던 마케터 Y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이직은 하지만, 요즘 참 세상이 무서우리만치 빠르다고. 이미 빠른데 그 빠름이 자신에게 다가오니 체감율이 다르다고.

나도 내 년, 또는 내 후년 이직을 계획하고 있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문장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작가도 IT업계 종사자이고, 화자의 배경도 IT업계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207p 수많은 공장노동자가 근무했던 가리봉동, ‘공순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미싱을 돌리던 동네다. 가산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높은 빌딩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공장은 돌아가고 있다. 미싱 대신 노트북으로 장비가 교체됐고 섬유 공장이 IT공장으로 변했다. 나 역시 노트북 하나를 받아 파워포인트나 엑셀과 씨름하며 하루 열다섯 시간씩 노동했다. 여행 사이트를 구축하고 쇼핑몰 앱을 만들었다.

 

 

엄마 회사가 가산동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또 다시 마음이 울컥했다.

업계 지인들을 만나면 종종 우리는 IT 미싱러들이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사실이다. 1인 1메뉴가 아닌 1인 1노트북으로 파워포인트를 만지작 거리고, 해외에서 사용한다는 프로토타이핑툴을 사용한다. 언어도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물론 중간중간 사이안의 연애사도 나오긴 하지만, 워낙 사건 위주라 리뷰에서는 생략하려고 한다.

사실 소설인지라, 연애사나 중간에 숨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진짜 현실에선 연애조차 있는 듯 없는 듯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이안이 연애를 열심히 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내가 본 화자는 그저 연애에 있어 부모님을 대신할 의지의 버팀목이었다.

그녀가 서른이 지난 후에는 버팀목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막바지에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꼭 여성들이 읽기를 권했다.

솔직히 나는 책 내에서 여성 서사와 함께, 분노할 요지들이 많아 여성작가분이 쓰신 줄 알았더랬다.

알고보니 정말 딱, "기획자처럼 생기셨다!" 싶었다. (절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도서관에 신청한 보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나도 언젠가는 사이안처럼, 꿈 속의 잔다르크의 계시를 받을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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